두 비석 사이로 대첩비 건립 경위를 기록한 ‘동령소갈’(東嶺小碣) 비석이 세워져 있다.
좌수영 수군들은 평소 이순신을 저승사자처럼 무서워했다. 그렇지만 그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그의 죽음을 슬퍼한 휘하의 장졸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주머니를 털어 타루비를 세웠다.
타루비는 왜란 7년간의 고난의 역사와 백성들의 참담한 삶, 수군들의 탄성과 비명, 천지를 뒤덮은 포성이 담겨있다.
여수 통제영 유적지 가운데 고소대에 있는 이들 비석이야말로 왜란 중 수군들의 영광과 고난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타루비는 전라 좌수군들의 눈물과 한이 담겨 있다. 비신 앞면에 ‘타루비(墮淚碑)’란 비명이 적혔고, 하단 좌측에 ‘만력삼십일년 추입(萬歷三十一年秋立)’은 건립 시기를 1603년 (선조36년)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은 임란 당시 “수군은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하는 수중 귀신굴”이라 말할 정도로 한탄하며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수군 수십만 명이 해전에서 전사하여 수중고혼 되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전라좌수군은 이 지역 백성이 특히 많았다. 그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수군으로 징발된다. 죽음보다 싫었을 테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왜적선이 불타고 격침될 때마다 자신의 처지를 잊고 환호했으며 승리하면 가족 품에 돌아갈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을 안고 죽어갔을 것이다.
전우들의 죽음을 보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충무공 부하들은 그가 전사한 지 6년 만에 세운, 이 비석은 전라좌수영의 가장 값진 유물이라 할 것이다.
여수거북선축제는 축제 첫날 오전, 충민사에서 고유제에 이어 타루비와 수군 대첩비를 참배하고 오후부터 본격적인 축제를 연다.